(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양해해 주신다면, 조금 도전적인 질문으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기독교와 공공선 논의를 하고 있는 지금 기독교는 공공선(公共善)을 위한 자리에 있는가? 오히려 공공악(公共惡)을 생산하는 자리에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에게는 ‘기독교의 공공선’에 관한 논의보다 ‘기독교의 공공악’에 관한 논의가 더 필요한 것 아닌가?
예수님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셨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교만과 무지로 인하여 신앙과 세상에 대한 오해와 혼동에 빠지면 거꾸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기독교’를 만들어낸다. 그리스도인들은 선하고 세상은 악하다는 이분법은 오해다.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든지 세상을 악하게 만들 수 있다. 사람은 다 죄인이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인간들의 악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한쪽에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을 돕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지만, 다른 한쪽에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을 몰아내라고 소리 지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예수를 믿어 내세의 천국에 가겠다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냉혹하게 공격하고 세상을 이생의 지옥으로 만드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오늘의 세상은 두려운 마음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묻고 있다. 권력자들의 불의는 쉽게 용서하면서, 권력에 의해서 무시당하는 희생자들과 서민들의 외침에 대해서는 도리어 비난하는 냉정한 기독교, 나의 이익과 우리의 안녕을 위해서 사회의 소수자들과 나그네들을 몰아내자는 구호에 열렬하게 반응하는 오늘의 무정한 기독교는 과연 누구를 위한 기독교이며, 무엇을 위한 기독교인가? 정치적 극단주의를 열렬히 지지하면서 사회의 소수자와 약자들을 악몽과 공포에 빠뜨리는 복음주의자(evangelicals)들이 전하려는 복음(福音)은 도대체 무슨 복음의 좋은 소식(good news)이란 말인가?
이것이 21세기 초반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기독교’의 사회적 진상이다. 개인주의적 복음을 추구하는 한국의 기독교는 사회적으로는 거의 파산한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의 사회적 파산, 교회의 사회적 실패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기독교인들과 교회의 신앙 속에 숨어있는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악, 기독교의 공공악이다.
먼저 ‘개인주의적 복음주의’로 인한 한국교회 신앙의 신학적 비(非)사회성은 기독교의 공공악의 뿌리가 된다. 우리가 배워온 복음은 기본적으로 개인적 구원의 복음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갚으셨는데, 이 죄인들은 ‘개인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어서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 ‘개인적’ 구원의 논의에는 집단과 사회의 문제가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다. 개인적인 구원에 관한 관심에 집중하여 사회와 집단의 일에 관심이 없는 개인적 복음주의는, 신자들을 사회적 정의와 불의의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회적 무관심’의 상태에 빠뜨리거나, 사회적 삶의 긴장과 갈등에 대해서 뚜렷한 인식이나 이론이 없는 ‘사회적 무지’의 상태에 빠져들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무관심도 문제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무지는 ‘정치적·사회적 극단주의를 지지하는 기독교인들의 공공악’의 모판이 된다.
다음으로 ‘자기 사랑의 복음주의’로 인한 한국교회 신앙의 실천적 반(反)사회성은 ‘기독교의 공공악’의 충만한 근원이 되고 있다. 인생에는 세 가지 사랑,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과 자기 사랑이 있다. 하나님 사랑은 초월적인 측면에, 이웃사랑은 공적 질서에, 자기 사랑은 사적 생존에 연결된다. 기독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강조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인생과 신앙은 실상 개인적인 자기 사랑에 매달려 있다. 우리가 고백하고 찬양하는 하나님 사랑조차 사실은 ‘나’를 구원해 주고 ‘나’를 위로해 주는 ‘나’의 하나님에 대한 ‘반사된 자기 사랑’으로 집중되어 있으니, 자기 사랑의 신앙적 위력은 실로 엄청나다. 십자가에 매달려 자기를 부인하신 예수님에게 ‘나’를 사랑해 달라고 매달리는 자기 사랑의 복음주의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적 배신이다.
‘자기 사랑의 기독교’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면 ‘개인적 자기 사랑’의 성공주의, 기복주의 신앙으로 온건하게 나타나지만, ‘자기 사랑의 기독교’가 집단적인 차원으로 전개되면 금방 ‘집단적 자기 사랑’의 국가주의·반공주의 우상숭배, 인종주의 우상숭배의 극렬한 사회정치적 폭력성과 결합된다. 이것이 한국에서 자기 사랑의 태극기와 동맹을 맺은 자기 사랑의 십자가, 미국에서 자기 사랑의 백인 인종주의와 결합한 자기 사랑의 백인 복음주의가 등장하게 된 논리적 필연성이다. 21세기의 세계는 ‘자기 사랑의 복음주의’를 통해서 ‘자기 사랑의 집단적 이기주의’와 정치적·영적 동맹관계를 형성한 반사회적 기독교의 사회정치적 공격성에 경악하고 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예수님의 선포는 불신에서 믿음으로 넘어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이고 신앙적인 악에 대한 ‘회개’를 요구한다. 우리가 기독교와 공공선, 기독교의 공공선을 논의할 때에 뭔가 짠맛이 나지 않고 조직폭력배 어깨의 ”차카게 살자“라는 문신의 문구처럼 막연하고 실효적이지 않은 느낌이 드는 것은, 우리의 약점 즉 기독교의 공공악에 대한 회개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독교와 공공선’에 대하여 논의할 때에는 당위로서의 ‘공공선’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전체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는 현실로서의 ‘공공악’에 대하여 더 체계적인 분석과 회개의 논의가 선차적으로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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