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학부 시절, 삶에서 학문과 신앙은 쉽게 일치되었다. 전공인 사회복지학은 가난하고 취약한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집중하기 때문에, 개신교 신앙과 무관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일치감은 모든 학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참 감사한 것이었다. 당시 나는 내가 선택한 학문을 통해 자연스레 신앙을 강화할 수 있었다.
대학원 생활에서 학문과 신앙은 부딪쳤다. 각종 문제의 사회구조적 원인을 다루는 사회과학을 공부할수록 개인의 죄와 성화를 강조하는 신앙이 부조리하게 느껴진 탓이다. 이 문제는 특히 빈곤을 연구하는 내게는 더 곤란한 것이었다. 인류학자 오스카 루이스는 빈자의 결함을 빈곤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빈곤 문화론’을 1960년대에 발표한 바 있다. 그는 빈자를 단죄하고 빈곤의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했다는 이유로 지탄받았고, 이후 학계에서 빈곤을 개인의 문제로 여기는 접근은 급격히 쇠퇴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개인에 대한 계도는 지극히 당연한 반면 구조적 문제는 무관심의 대상 혹은 부정적 취급의 대상이었다. 믿는 바와 배우는 바가 충돌하며 내면에서 혼란은 가중되었고, 사회문제에 대한 눈이 뜨이자 교회의 수구적 태도는 더는 견디기 힘든 것이 되었다.
이후 수년간 방황이 이어졌다. 내가 할 수 있었던 바는 신앙을 학문에 맞추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목마름을 해소하려는 과정에서 접한 해방신학을 필두로 소위 ‘진보적 신학’에 매료되었다. 가난을 사회적 억압과 연결하는 점, 빈자를 주님의 우선적 사랑의 대상으로 높이는 점이 좋았다. 코로나19를 계기로 형성된 온라인 예배에서 진보적 설교에 입문한 나는 오프라인 예배의 재개 후에는 그 교회들을 하나하나씩 방문하며 마음을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시기는 그간 교회에서 느끼기 힘들었던 휴머니즘을 경험한 시간이었다. 투쟁 현장을 성전 삼아 가난한 자와 연대하고 구조 악에 함께 저항했던 활동은 성서를 발로 읽는 크나큰 배움의 기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자 들어간 쪽방촌에서 마음은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그곳에서 사역하는 진보적 교회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보수적 교회의 쪽방촌 점유는 흥미로웠으나, 가난의 문제를 사회구조적으로 해석하는 교회가 정작 빈민가에 부재하다는 점은 내게 짙은 허무감과 실망감을 안겼다. 결국 나는 쪽방촌에 거주하면서도 가난에 대한 의미 있는 설교를 듣기 위해 주일마다 먼 동네의 교회에 가야 했다. 학문과 신앙을 조화시키려는 끈질긴 노력이 만들어낸 이 역설에 나는 지쳐갔다.
보수적 교회들의 사회선교에 대한 오랜 참여관찰 역시 심란한 과정이었다. 단 그들이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 빈자를 섬기는 점은 존경스러웠다. 쪽방촌의 교회들은 분명히 빈자에게 다양한 도움을 제공했다. 굶주린 이를 먹였고, 헐벗은 자를 입혔으며, 환자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했다. 옆에서 지켜본 구제의 과정은 쉽게 비판할 수 없을 만큼 무게감이 상당했다.
유감스럽게도 그 무게감이 빈자에 대한 각종 통제를 정당화했다. 특히 가난하다면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자주 선포되었다. 빈약한 나눔과 생색내기, 후원을 위한 사진 촬영, 자존심을 훼손하는 설교, 쪽방의 바퀴벌레 떼를 성령의 비로 비유하는 간증, 열악한 쪽방도 마음만 먹으면 천국이라는 위로답지 않은 위로, 상대가 굽신대지 않거나 개종을 거부하면 여지없이 수행된 악마화, 돕는 이를 영웅화하고 받는 이를 열등한 존재로 구분하는 빈민가 투어 행위까지. 지난 5년의 연구 과정에서 나는 흔히 ‘선한 것’으로 불리는 구제에 교묘하게 ‘악한 것’이 섞여 있음을 보았다.
나를 넘어 이웃과 타인에게 나아가려는 방향성은 부인할 수 없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교회들은 모두 거기까지만 말한다. 막상 그곳에 발을 내디딜 때 경계해야 할 지점들은 말해주지 못한다. 그러면 빈곤층 구제는 그 자체로 숭고한 것으로서 인간이라면 마땅히 (추구)해야 할 바로 격상될 뿐이다. 반면 나는 그러한 설교를 따랐을 때의 이면을 경험했다. 고맙지만 수치스러운, 도움이 됨에도 기분 나쁜, 그래서 의존하기 싫지만 결국 의존하게 되는, 쪽방도 천국이라는, 현실과 동떨어진 설교에 생존을 위해 아멘을 외쳐야 하는, 빈곤층 구제의 잔혹하고 어두운 이면을.
역설적으로 학문과 신앙은 일치되어갔다. 빈자가 아닌 돕는 자를 각성시키는 신앙이 사회문제로서의 빈곤을 줄이려는 연구 방향과 접합되면서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빈곤층 구제 행위가 아닌, 그것이 미칠 수 있는 악을 주의 깊게 성찰하는 행위가 공동선에 더 기여한다고 믿는다. 이는 구제를 중단하자는 것이 아닌 행동 너머를 바라보자는 제안이다. 성찰 후에도 빈자를 돕거나 연대하는 나의 행위가 여전히 상대에게 도움과 피해를 함께 줄 수 있다는 겸손한 인식, 즉 선과 악이 생각보다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너무나도 절실하게 요구되는 지금이다. 그럴 때 선을 행한다는 자기 확신으로 가득한 돕는 자의 교만은 낮아지고, 죄악된 존재로 낙인찍힌 빈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선함은 비로소 발견될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다”(누가복음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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