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하임 포탁(Chaim Potak)의 <탈무드의 아들>(The Chosen)은 유럽에서 이주한 유대계 미국인 가정의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이다. 두 가정의 양육에 대해 소개하는데 그중 ‘차티크’라 불리는 하시드파의 지도자인 아이작 손더스의 아들 대니 손더스는 한번 책을 읽으면 사진처럼 기억하는 명석한 기억력의 소유자이다. 아들은 “글을 읽는 게 아니라 아예 삼켜버린다.” 그러나 그런 아들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아들에게는 가슴, 긍휼, 의로움, 자비, 그리고 고통을 견딜수 있는 힘이 필요할 뿐 ‘영혼 없는 정신’이 필요한 게 아니라고 여긴다.
아이작 손더스의 가정교육은 우리 부모의 그것과 달랐다. 똑똑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긍휼과 자비, 영혼과 가슴이 없다면 명석함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으리라고 우려한다. 아들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느끼시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이웃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린다고 믿는다.
성숙한 사람은 인간이 관계의 존재임을 아는 사람이다. 예술가들도 예외가 아니다. 예술가는 문화적 행위를 통하여 이웃과 소통하며 세상에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 물론 이런 지속적인 실험이 검증되는 곳은 일터 속에서이다.
미술의 공공성과 관련하여 떠오르는 것은 공공미술의 형식을 띤 ‘마을미술 프로젝트’이다. 필자는 이 프로젝트를 초기에 틀을 잡으며 몇 년간 참여한 적이 있다. 마을미술 프로젝트는 익숙한 갤러리 대신 산간마을이나 도시의 소외지역에 공공적 성격의 미술을 접목시키는 것을 개요로 삼았다. 그런데 일을 추진하면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일반과의 괴리감이랄까, 생소하게 여겼을 법한 프로젝트였음에도 지역주민이 발 벗고 나서서 참여하는 열띤 반응을 보인 것이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농촌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작가들의 도움 아래 도자기를 굽고 염색도 해보고 그림도 그려보았다. 마을에 벽화와 조형물이 들어오고 작가들과 창작을 하는 색다른 체험을 만끽하였으며 마을을 생동감 있게 바꾸어준 것에 대해 만족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보행로, 골목길, 마을센터, 경로당, 강변, 포구, 주민자치센터, 복지시설, 장애인 시설 등 장소는 달랐지만 주민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그들은 미술품이 지역공동체의 자산으로 남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했으며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던 예술품이 삶의 공간에 설치되는 것을 마냥 신기하게 여겼다.
공공선의 구현은 지역사회에서 조용히 일어나기도 한다.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성좌원(星座院)은 많은 편견에 시달리며 살아온 한센인이 모여 사는 공동체이다. 이곳은 같은 지역에 속해 있으면서도 고도(孤島)와 같은 곳으로 인식되던 장소였다. 그런데 젊은 예술가 단체 ‘솜아트’는 성좌원 주민들의 삶을 담은 아카이브 영상을 제작하고, 성좌원 한센인들이 사용하던 물품을 반짝이는 별로 만들어 은하수를 꾸미는 아름다운 영상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성좌원 주민들의 삶을 담은 솜아트의 영상 아카이브
주민들의 그림 전시회를 갤러리에서 개최, 지역민과의 소통을 꾀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예술인들이 중심으로 합창과 인물 드로잉 제작 등으로 성좌원 어르신들의 문화예술 향유 확대 등을 시도하였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예술인들 역시 협업을 통해 다른 분야를 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외에도 어르신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만일 기독교가 사회에서 맡은 역할을 해내려면 신앙 공동체 밖의 타인들을 찾아야 하며 섬김을 통해 타자들의 완전함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공동선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느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나타내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화를 좁은 시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인식은 그리스도인의 문화 참여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문화가 죄로 물들어 있어 무거운 마음을 갖게 하지만, 그것이 회복의 대상이 아니라 배척의 대상이 된다면 그리스도인은 영영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창조 세계를 섬기는 임무가 철회되었다는 암시는 아무 데도 없다. 우리는 양질의 문화를 즐거이 만들고 공급하는 데도 힘을 써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 있다.
밴 위더링턴 3세(Ben Witherington III)가 말했듯이 흔히 문화는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을 만든다고 하는데 이는 단순히 비유나 은유가 아닌 진짜 사실이다. 문화에는 항상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창의성의 도장이 찍혀 있다. 즉, 우리에게는 무엇이든지 훨씬 잘 만들어보려는 선천적인 의도와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창조주이고 통치자이며 유지자이고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에게 내재된 본성이다. 우리는 개인의 구원과 축복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제는 우리에게 부여된 창의성을 발휘하여 자기 주변 장소와 사람들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공통과제에 협력해야 한다는 더 넓은 인식의 지평으로 나가야 한다.
예수님께서 참된 행복에 필요한 샬롬, 즉 공동선을 추구하는 은혜 충만한 삶을 경축하셨던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인류의 공통과제에 참여하라는 요청이다.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벧전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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