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코로나19 이후 교회의 공공성
<하나님의 공공선> / 송용원 / 성서유니온 / 2020
공공성으로 충분한가?
지난 4년 동안 모든 이슈를 집어삼킨 코로나19 사태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 이번 2023년 수능에서는 코로나 확진자들도 마스크를 쓰면 한 교실에서 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계적인 팬데믹 재난이 끝난 후 공적 영역에서는 그 기간 보여준 교회의 대처를 보고 교회의 공적 역할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의심하고 있다는 통계와 연구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다. 이제 교회는 어떻게 공공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한국 기독교는 초기부터 공공성에 대해서 고민했던 공적 교회였다. 하지만 해방과 전쟁, 이후의 극심한 가난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산업화를 경험하면서 교회는 또 다른 형태의 공공성을 지지하는 신학과 사상을 만들었다. 이전에는 민족주의라는 공공성을 지향하였다면, 이제는 경제 발전과 풍요라는 공공성을 격려하는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이 유행하였다. 많은 사람은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이 신앙의 공공성을 약하게 만들어, 기독교 신앙을 개인화, 사사화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역사와 상황에 따라서 사회가 요구하는 공공성의 변화에 교회가 반응한 것이었다. 교회는 언제나 공공성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문제는 서구 사회에서 논의하는 공공성에 대한 논의이다. 서구 사회는 공공의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구분하여 공공의 영역에서 배제해야 할 사적인 요소들을 지정하였다. 혈연, 인종, 언어, 성, 종교 등은 사적인 영역에 속한다. 이와 달리 국가, 교육, 정치, 경제, 군사 등의 영역은 공적인 영역이다. 그리고 이 두 영역은 서로 위계를 지닌다. 공적인 영역이 사적인 영역보다 더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공적인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적인 영역은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과거에는 민족을 위해서 전쟁을 했다면, 근대에는 국가를 위해 개인이 전쟁에 참여한다. 국가 안에는 여러 혈족과 인종, 종교를 가지 사람들이 섞여 있다. 국가라는 공적인 영역을 지키기 위해, 사적인 영역의 희생이 당연시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공공성은 국가주의라는 기반 아래 근대에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제 위에서 공공신학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결국 공공신학은 교회가 국가나 사회가 정한 아젠다와 이익에 부합하는 역할을 하여서 교회를 공공의 영역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일종의 운동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현실 인식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이는 유의미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세계 속에서 교회의 영역을 공공의 주체가 아닌 한 영역으로 축소하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만들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일지는 의문이 있다.
공동선의 재발견
저자는 <하나님의 공공선>에서 공공성의 기초라 할 수 있는 공공이 공유하는 공동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공동선(公同善)은 공공성(公共性)이나 공익(公益)보다 큰 개념입니다. 공(公)은 영어의 public에 가깝고 공(共)은 common에 가깝습니다. 공(公)은 통합된 전체의 의미가 강조되어 위에서 아래를 조절하는 뉘앙스가 짙은 단어이지만, 공(共)은 구성원 각각의 개별성이 강조되는 뉘앙스가 짙은 단어입니다.....공공성이나 공익은 전체를 강조하는 개념이지만 공동선은 전체와 개인 모두를 소중하게 여기는 개념입니다.”(29면).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공공성을 중요시하는 분들은 자신들도 약자를 배려하고 돕는 것과 개인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논의의 핵심은 어떤 가치와 의제를 중요하게 여기느냐가 아니라 그 의제와 가치를 누가 정하느냐에 있다. 공적인 영역이 사적인 영역의 가치를 규정하는지, 아니면 사적인 영역이 공적인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는 열린 구조인지가 중요하다. 아쉽게도 현대의 공공성은 이러한 열린 태도를 수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가 정의한 공동선은 영역과 위계를 구분하지 않는다. 인간이 공유하는 공동선을 개인과 공동체가 공유하고, 이를 서로 증진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자칫 이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 우리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개인이 희생되는 경우를 고대로부터 학습하였기 때문이다.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이러한 희생양 현상이 고대에서부터 빈번하게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개인과 공동체는 수평적인 축만이 아닌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수직적인 축이 하나 더 필요하다. 공동선이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만 작동할 수 있는 은총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 은총은 두 개로 나뉜다. 하나는 창조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을 향한 ‘일반은총’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만을 위한 ‘특별은총’이다. 그러므로 공동선은 하나님께서 신자와 비신자를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주신 ‘일반은총’인 것이다.
공동선과 환대, 그리고 정의
공공신학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공동선이란 공적, 사적인 영역이 아닌 인류가 공유하는 선함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공동선이란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인종, 종교, 빈부, 성에 따라 달라질 수 없다. 그러므로 공동선이란 약자와 소외된 자들을 향한 환대에 기초해야 한다. 공동선의 시금석은 약자를 향한 태도라는 것이다. 그 사회의 최약자에게 공동선이 실현되고 있다면, 그 사회는 공동체와 개인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수직적이며, 신적인 은총이 임한 정의로운 사회이다. 물론 이는 교회와 신자들이 자랑치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사는 사회가 강자들의 세상이라면, 이는 누구의 책임일까? 하나님은 교회와 신자들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마 25: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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