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나는 기독교적 가정에서 자랐고 미션스쿨을 나왔지만 젊은 시절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신앙과 직업을 별개로 생각한 명목상 그리스도인이었기에 대학에 자리를 잡고서도 간극을 좁히지 못했다. 그러다가 불혹의 나이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이 전환점이 되어 이전과는 다른 모양의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뒤로 생긴 변화는 신앙과 직업의 거리가 좁혀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기독교 세계관을 접하면서 현저해졌다. 안동대 신상형 교수님의 추천으로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에 처음 발을 내딛게 되었고, 전공인 미술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신국원 교수님과 최태연 교수님을 알게 되면서 개혁주의 예술과 미학 연구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술과 미학에도 학문적 탁월성을 갖고 계신 분들 덕분에 내가 종사하는 미술 분야에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동참하게 되었다.
두 번째 변화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으로 시야를 넓힐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동역회의 기관지 <신앙과 삶>은 주제가 매회 달라짐에 따라 원고도 그에 맞추어 준비해야 했다. 그동안 다루어진 특집 주제는 ‘공공선’, ‘저출산’, ‘ChatGPT’, ‘재난사회’, ‘생태환경’, ‘난민 문제’ 등 사회적인 이슈가 많았는데, 우리 사회의 현안들을 기독교적 맥락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공부가 되었다. ‘전시장 내 미술’이 아니라 ‘공동체 속의 미술’의 가능성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 관련하여 미술계에서 필자가 섬기는 단체를 소개하고 싶다. 크리스천 작가들로 구성된 ‘아트미션’(회장 천동옥)이란 모임이 그것이다. 이 모임은 ‘영화롭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문화’ 확립을 비전으로 매해 정기전과 특별전, 학술회, 앤솔로지(anthology) 발간 등의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작년에는 창립 25주년을 맞아 ‘생명 돌봄’을 테마로 55명의 작가가 생명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기념전을 가졌다. 그동안 진행된 여러 행사도 의미가 있겠지만 구성원 각자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예술 공동체 속에서 삶과 비전을 공유하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한다.
아트미션은 매해 크리스천 아트 포럼을 열고 학술지를 발간하는데 동역회의 여러분들이 섬겨주셔서 지금까지 17권을 발간할 수 있었다. 예술 분야에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펼쳐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기독교 세계관이야말로 예술가들에게 꼭 필요한 지식, 곧 예술은 무엇이고 왜 예술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기 때문이며, 예술가로서의 소명과 문화적 책임에 대해 알려주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가 말한 ‘탈주술화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의 예술가들에게 성경적 인생관을 갖추는 일이 무엇보다 요구된다.
내가 개혁주의 예술을 연구하게 된 것은 예술은 선하신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졌다는 데서 출발하며 그분이 만물의 머리가 되신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장 칼뱅, 아브라함 카이퍼, 한스 로크마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C. 시어벨트, 존 윌슨, 루셔스 뒤보, 윌리엄 더니스, 마코토 후지무라 등을 연구하면서, 시각 예술 부문에서도 종교개혁의 유산과 가능성을 조명하는 논의가 꾸준히 있었고 이 시대의 예술가들에게 이를 소개하고 공유할 필요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앙에 기초한 예술을 공공장소에서 발표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자신의 신앙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미술대학에서조차 터부시되고, 혹 모독적이거나 탈선적인 작품이 아니라면 미술 저널도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느헤미야 시대에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과 불타버린 성문을 보는 것처럼 성민(聖民)의 삶을 사는 것이 어려워졌음을 실감하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교적 의미가 투영된 작품을 하는 예술가는 자의적으로, 타의적으로 자신의 작품의 형식적 특성, 테크닉 또는 표현방식에 대한 발언에 만족해야 한다. 작품에서 진지한 대화의 결여나 정체성의 누락은 예술가들에게 가장 필요한 정신세계를 누락시키기 때문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핵심적인 가치가 공공의 장에서 물러나 은둔의 세계 속에 갇혀 버린 셈이다. 일터에 있으면서 나는 그런 문제들과 씨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종종 목격해왔다.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가 수월하지 않다. 용기 있는 예술가라면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예술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 일터에서의 긴장과 하중을 견딜만한 영적·이론적 훈련이 요구된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주요 그리스도인 작가들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여 종교개혁과 그 예술적 유산을 점검하는 것을 숙제로 여기고 있다. 이제는 퇴임도 했으니 미루어온 연구에 집중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은사를 부어주신 목적은 일차적으로 그분의 선하심을 기억하고 그 유익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데 있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책임감 있게 행동할 것을 매번 느낀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권능과 현존을 증거할 수 있게 지혜를 주시기를 주님께 기도를 드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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