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어깨 위의 어깨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김기현 / 죠이북스 / 2023.
책도 싫은데 고전이라니. 꾸릿한 오래된 종이와 잉크 냄새, 누렇게 빛바랜 이해할 수 없는 암호들, 벽에 못 하나 박지 못할 백면서생 주제에, 세상 모든 진리를 품은 양 고고한 척 하는 모습이 꼴불견이다. 하루치 삶의 숙제도 산인데 또 뭐 하려고 고생 또 고생 거인의 어깨까지 올라야 하는가. 그럼에도 나의 인생에 가장 충만한 순간을 꼽으라 한다면 '읽을 때'이고, '쓸 때'이다. 열심히 살아도 바람 빠진 풍선이 될 때면 어김없이 읽는 것에서 멀어져 있다. 반대로 정신이 쏙 빠질 만큼 흔들리는 일상 속에서도 멀쩡히 서 있을 때는 책에 닻줄을 내리고 있을 때이다. 그러니 또 펴 본다.
'생태계 교란종' 누군가 이 책의 저자 김기현을 그렇게 불렀다. 신학과 철학을 넘나들고, 과거와 현대, 동양과 서양을 가로지르는 그의 깊이가 선을 넘었기 때문이다. 가벼이 나풀거리는 유튜브 시대에 학자라는 표현에 가장 가까운 인물인 그는 여러 저서를 통해 좋은 글 선생으로 판명이 났다. 특히 <공격적 책 읽기>, <공감적 책 읽기>, <부전자전고전>,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로 서평의 새장을 열었고, 많은 중생을 독서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나도 그들 중 한 명이다. 이번에는 그의 전문분야인 신앙 고전이다. 만권의 사람 김기현이 선택한 고전은 무엇일까?
책은 2부로 나누어져 있고, 각 부는 10권씩 총 20권의 신앙 고전을 다룬다(여는 책과 닫는 책을 합치면 22권이다). 무거운 주제와 달리 가독성이 갑이다. 세월이 검증한 고고한 지혜가 작가의 손끝에서 소화하기 딱 좋은 모양이 되었다. 동시에 학자다운 깊이와 날카로운 비판으로 그 맛이 달콤하면서도 쌉쌀하다. 덕분에 이 책은 고전의 높은 진입 장벽을 도전하게 하는 좋은 계단이 된다. 선정된 도서도 대부분이 널리 알려진, 혹은 책장에 몇 권쯤 있을 법한 책이라 관심이 더 간다. 독자들이 서문에서 포기해야만 했던 거인들을(고전) 저자는 능숙하게 요리한다.
일단 목차만 봐도 배가 부르다. 아타니시우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파스칼 <팡세>,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짐 윌리스 <하나님의 정치>,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도스토옙스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엔도 슈사쿠 <침묵> , 앙드레 지드 <탕자, 돌아오다>, 헨리 나우엔 <영적 발돋움>, 몰리노스 <영성 깊은 그리스도인>, 귀고 2세 <수도사의 사다리>,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등등. 지적 욕구를 마구 자극하는 고전이 즐비하다. 설명도 좋고, 저자가 추천한 ‘함께 읽을 책’은 더 좋다. 좋은 안내자 덕분에 베일 벗겨지니 다시 도전하고자 하는 욕구가 솟구친다. 개인적으로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성 요한의 <어둔 밤>이다.
"처음에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너무 좋았다. '이게 예수 믿는 맛이구나' 싶어 신이 났다. 허나,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하나님'은 아닌 게다. 그러기에 어미가 젖을 떼기 위해 젖가슴에 쓰디쓴 먹칠을 해두듯, 어머니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한 메마름과 내적 암흑 속에 두신다. 우리는 어미에게 버림받았고, 사랑받지 못한다고 야단법석 떠는 아이와 같다. 더 좋은 것을 주기시기 위한, 성장을 위한 과정인데 말이다."(79)
'하나님의 부재'를 이리도 친절하게 설명한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도 그 깊이와 울림이 다르다. 같은 제육볶음이라도 '선미식당'(우리 집 앞 맛집)에서 먹는 것과 집에서 먹는 것이 다르듯 고전의 가르침에는 무언가가 있다.
이 책은 그저 고전만을 소개하는 목록이 아니다. 저자는 22권의 책을 통해 ‘영성’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힌다. 한국교회가 그렇게도 외치는 '영성'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영성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몸으로 살아내는 일"이라 정의한다. 말씀이며 영이신 하나님이 육이 되셨고, 육이 되신 예수님은 글(성경)이 되셨다. 그 글을 따라 육이 되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 영성이다. 20여 명의 대가들 글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말)을 삶(몸)으로 살아낸 '영성'의 실체인 것이다.
다 좋은데, 도대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케케묵은 고전이 무슨 필요일까? AI가 인간을 대신하고, 전기차에 우주여행도 코앞인데. 근의 공식도 모를 위인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 웬걸 의미가 있다. 변하는 것은 세상이지, 말씀도 사람도 변하지 않는다. 그들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다. 그들의 고민은 나의 고민이고, 나의 고통은 그들의 고통이었다. 그러니 고전에는 나의 고민에 대한 대가들의 답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수백, 수천 년을 건너온 보물이 거기에 있다.
이 책을 보니 왜 글과 가까이할 때 삶의 충만함을 경험하는지 깨닫는다. 읽는 것이 전부는 아니나 영성의 일부, 그것도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읽는 것과 멀어질 때 삶은 소리 나는 구리,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 소크라테스도 이를 알아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말했다. 읽을 때 성찰이 일어난다. 특히 고전은 무엇보다 맑은 거울이다. 낑낑대며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저자) 덕분에 나는 난쟁이 위에만 올라가도 되니 감사할 뿐이다. 최고의 고전 가이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를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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