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19세기 네덜란드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였던 판 프린스터러(Groen van Prinsterer, 1801-1876)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에게 큰 영향을 준 그리스도인이다. 특별히 그는 개신교 정통주의 신앙인으로서 프랑스 혁명의 반신앙적 성격을 주목하면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반혁명당 창당에 도움을 준 인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우리가 판 프린스터러의 사상을 다루는 것은 초기 네덜란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사상적 배경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기에, <신앙과 삶>은 ‘온전한 지성’ 지면을 통해 3회에 걸쳐 간략히 나누고자 한다.
판 프린스터러(Groen van Prinsterer)는 1801년에 출생하여 1876년에 타계했다. 프린스터러의 정식 이름은 기욤 흐룬 판 프린스터러(Guillaume Groen van Prinsterer)이다. 사람들은 판 프린스터러에게서 그의 이름 기욤(Guillaume) 이외에는 네덜란드적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한다. 프랑스식 이름인 기욤은 아마 그의 유아 세례 시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짐작될 뿐 정확한 연원은 알지 못한다. 어쨌든 그는 철두철미 네덜란드 사람이었다.
당시 유럽은 혁명의 기운에 휩싸여 있었다. 1789년, 그러니까 판 프린스터러가 태어나기 약 10년 전에 프랑스 혁명이 발생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과 함께 시작된 1789년 혁명을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까지 아울러 ‘프랑스 혁명’이라고 한다. 뿐더러 당시에는 스페인, 영국,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를 포함한 유럽 각국에서 크고 작은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판 프린스터러는 그 생애의 많은 부분을 혁명의 그림자 아래에서 살았다. 판 프린스터러의 생애는 혁명을 배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유명한 강연의 제목이 ‘불신앙과 혁명’인 것이 이상하지 않다. 참고로, 아브라함 카이퍼는 1837년에 태어나 1920년에 타계했으므로 판 프린스테러의 생애와 40년이 겹친다.
17세기는 네덜란드의 황금기였다. 암스테르담은 유럽 교역의 중심지였고, 암스테르담을 드나드는 배의 톤 수가 전체 유럽을 드나드는 배의 톤수의 절반을 차지했다고 한다. 네덜란드는 동인도 회사를 세워서 세계 제1의 무역 강국이 되었고, 동남아시아와 인도와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뉴암스테르담이 뒤에 뉴욕이 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유럽 국가들이 아시아에 세운 회사였다. 영국은 1600년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했고 네덜란드는 2년 후인 1602년에 설립했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최초의 다국적 기업이었다.
그러나 식민지를 놓고 강대국인 영국 및 프랑스와 벌인 네 차례의 전쟁으로 국력이 쇠하더니 마침내 네 번째 전쟁인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 네덜란드는 강대국의 지위를 잃고 대신 영국이 해양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당시에 확장 정책을 펴던 프랑스는 1793년 네덜란드에 선전포고하였고, 1795-1806년에는 네덜란드에 친프랑스 바스티아 공화국을 세워 네덜란드를 통치했다. 뒤이어 1806-1810년에는 나폴레옹(Napoléon)이 네덜란드에 홀랜드 왕국을 세우고 자기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Louis Bonaparte)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더니 1810-1813년에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병합시켰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패퇴한 1815년, 네덜란드는 독립국의 지위를 획득하여 윌리엄 1세가 왕으로 다스리게 되었다. 네덜란드 역사에서 1795-1813년은 ‘프랑스 시기’로 불린다.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판 프린스터러는 목사 집안에서 출생했다. 그의 조부, 증조부, 고조부가 모두 화란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의 목사였다. 하지만 판 프린스터러의 부친인 피터 야코부스 흐룬 판 프린스터러(Pieter Jacobus Groen van Prinsterer)는 의사였다. 온건한 개혁주의자였던 부친은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유능한 의사로서 네덜란드 사회에 의학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그는 루트헤르(오늘날의 수상에 해당하던 인물), 루이 보나파르트, 뒤에는 윌리암 1세의 왕실 주치의였다. 그의 국가적 공로로 그는 정부에 조언을 제공하는 ‘종신 고문’(Raad van State: Council of State)에 임명되었다.
판 프린스터러의 부친은 1797년에 23세의 고아인 아드리아나 헨드리카 칸과 혼인하였다. 그녀는 당시 네덜란드에서 가장 부유한 상속녀 중 하나였다. 그들은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첫째는 1799년생 딸인 코르넬리아 아드리아나, 둘째는 아들인 판 프린스터러, 셋째는 1806년생 딸인 마리아 클라지나였다. 코르넬리아는 로테르담 출신의 부유한 상인이던 마리 호프만과 혼인하였다. 호프만은 25년 동안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 막내인 마리아는 법률가인 요한 안토니 필립스와 혼인하였다. 뒤에 그는 상원 의장을 지냈으며 명예직인 ‘재상’(Minister van Staat: Minister of State)이 되었다. 판 프린스터러의 가정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네덜란드에서 최상위에 속하는 귀족 가문이었다. 그의 기본자세가 보수주의자였던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유럽의 보수주의는 한국의 보수주의와는 다르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이익집단에 더 가깝다.
판 프린스터러는 어렸을 때부터 재능을 나타냈다. 그의 부친 야코부스는 판 프린스터러가 자기 뒤를 이어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당시 그 가정의 사회적 위치를 생각했을 때 판 프린스터러가 최고의 교육 기회를 가졌으리라는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부친 야코부스는 1837년에 타계할 때까지 아들의 교육과 활동을 예의주시했다. 이런 사회적 조건은 판 프린스터러의 교육과 성장과 향후 활동을 위한 우호적인 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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