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나는 고리타분한 교리 중심의 신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십수 년째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듣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 서적을 고를 때도 독창적인 성경 해석, 번뜩이는 통찰력, 현실적 문제에 대한 긴밀한 응답이 담긴 책을 우선적으로 찾아 읽는다. 그러나 내가 교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교리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기도한다.
신앙은 한 사람의 존재 방식에서 가장 진솔하게 표현된다. 그 사람이 신(神)에 대하여 생각하고 말하는 것보다 그 사람의 삶이 그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더 잘 보여준다. 가령, 교회를 다닌다면 사영리(四靈理)의 제1원리인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는 명제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 명제를 자신의 진리 명제로 받아들여 몸에 체화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 명제를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세상의 삶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이방인의 염려로 불안해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타인의 인정과 안정을 기치로 남들 가는 대로 맹목적으로 끌려갈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은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벗어나 생계 이상의 삶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복음서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어렵던가?
교리를 자신의 진리 명제로 온전히 받아들여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 내게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가 가장 어렵게 느껴지며, 이따금 교리를 깨닫게 될 때 소스라치게 전율한다. 부끄럽지만 내가 부활을 믿게 된 지는 오래지 않았다. 나는 어떤 까닭에 부활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에 있는 위대한 진리인지 알지 못했다. 역사적 사실로서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믿는다는 것과는 별개로 이천 년 전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신앙하는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십자가 죽음을 모르는데 부활을 어찌 알겠는가?
나는 작년 한 해 동안 서기연(서울대기독인연합) 대표로 섬기며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배웠다. 하나님은 졸업을 앞둔 내게 갑자기 나타나셨고, 나를 매혹해 하나님께 내 마음을 드리게 하셨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강한 권능에 대해 들려주셨다. 하나님은 끈질기게 나를 설득하셨고, 나는 하나님의 설득에 넘어갔다. 나는 졸업을 일 년 미룬 채 대표를 하게 되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애써 모은 재정과 학문에 정진할 시간을 하나님께 전부 바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 안에 가장 귀한 것, 금은보다 귀한 것, 세상 지식보다 귀한 것, 예수를 앎이라.”라는 찬양의 고백이 내 삶의 고백이 되게 하셨다.
나는 대표로서 무엇을 하기보다 매일 밤 학생회관에서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다시 오실 나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이루실 것이다. 이를 무시한 채 자기 힘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이루고자 한다면 만족이나 기쁨이 없이 ‘결단-헌신-우울’을 반복할 뿐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내가 할 일은 날마다 죽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면,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우리 가운데 이루신다.
열심히 기도는 했지만 이른바 신비한 지식을 맛보거나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좌절하고 절망할 일이 많았다. 그런데 내가 절망할수록 내 힘이 빠지고, 하나님의 힘이 강해졌다. 나는 기도를 통해 날마다 죽는 법을 배워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내 자아가 죽는 법을 익히며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갔고 비로소 부활을 믿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배운 찬양은 부활 신앙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다음에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뭐라 말할까? 그때에는 부끄러움 없어야지. 우리 서로 사랑해. 하나님이 가르쳐 준 한 가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요).” 우리는 부활할 것이다. 이다음에 예수님을 만날 것이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우리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이 땅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고, 얼마나 높은 지위에 오르고,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남겼는지 자랑할 것인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가르쳐 준 한 가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 삶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주님 뵈올 날을 그리며 이 땅에서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부활. 여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에 있는 위대한 진리가 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면 모든 것이 달라져야 한다. 왜냐하면, 부활은 우리의 삶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는 시간이 아닌 영원의 관점에서 삶을 조망하고 조탁해야 한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 주가 사셨듯이 우리도 살 것이다. 주가 사셨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내가 믿는 부활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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