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19세기 네덜란드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였던 판 프린스터러(Groen van Prinsterer, 1801-1876)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에게 큰 영향을 준 그리스도인이다. 특별히 그는 개신교 정통주의 신앙인으로서 프랑스 혁명의 반신앙적 성격을 주목하면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반혁명당 창당에 도움을 준 인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판 프린스터러의 사상을 다루는 것은 초기 네덜란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사상적 배경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에, <신앙과 삶>은 ‘온전한 지성’ 지면을 통해 3회에 걸쳐 간략히 나누고자 한다.]
흐룬 판 프린스터러(Groen van Prinsterer)의 부친인 야코부스 판 프린스터러는 아들도 자기 뒤를 이어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가 아들을 위해 최상의 교육 기회를 제공했으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판 프린스터러는 레이든 대학의 법학부와 인문학부에 등록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고대와 현대의 문학, 철학, 법, 역사 등 인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했다. 1823년에 판 프린스터러는 그가 등록한 두 개의 학부 각각에 논문을 제출하여 두 개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논쟁에서 판 프린스터러가 구사한 라틴어는 당시의 가장 뛰어난 라틴어라는 찬사를 받았다.
졸업 후에 헤이그에서 한동안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던 그는 부친의 주선으로 윌리엄 1세의 비서가 되었다(1829-1833). 당시 남부와 북부 네덜란드(오늘날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넓은 영토를 다스리던 윌리엄 1세는 뛰어난 왕으로서 거의 절대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1813-1840). 내각과 의회는 거의 왕에게 보고서를 올리고 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기관에 불과하였다. 그 모든 보고서를 검토하고 분류하여 왕에게 올리고 때로는 왕의 명령을 작성하여 내려보내는 것이 비서인 판 프린스터러의 일이었다. 그는 거의 매일 왕을 만났다. 이것은 그에게 현실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현장 경험을 통해서 배울 기회가 되었다.
판 프린스터러는 왕가인 오렌지가가 속해 있었던 네덜란드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의 회원이었다. 기독교가 그에게 전혀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는 아직까지 확실한 신앙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변개를 경험하고 개혁 신앙을 받아들인 판 프린스터러는 과거에 누리던 호사와 세속적인 즐거움을 뒤로 하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투신하였다. 그는 이전의 자신의 신앙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 “종교를 별개의 것으로 여겼지, 우리의 전 존재와 결합되고 직조되어야 하는 삶의 원리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의 이런 고백은 당시 네덜란드를 감싸고 있던 온당한 합리주의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브뤼셀로 돌아와 궁정 목사 장-앙리 메를 도비네(Jean-Henri Merle d'Aubigné)가 인도하는 예배에서 복음 설교를 들으면서 그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과도한 업무와 내적 긴장으로 쇠약해진 판 프린스터러는 1833년 1월 중병을 앓으면서 죽을 고비를 넘긴 후에 마침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완전히 의탁하고 마음에 평화를 얻었다. 예전 신앙에 대한 그의 술회는 그 이후 그의 신앙의 성격을 보여 준다. 곧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그의 전 존재와 직조된 삶의 원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 정신은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영역은 하나도 없다”* 라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고백과 닿아 있다.
그는 1833년에 왕의 비서직을 사임하면서 왕가의 역사 문서 관리인으로 임명되었다. 그 자리는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웠던 오렌지가의 역사적 문서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판 프린스터러는 그 문서들을 연구하고 그것을 확증할 수 있는 2차 사료를 모은 후에 그 내용을 출판하여 네덜란드 역사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왔다.
개혁 신앙에 충실했던 그는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과 역사는 하나님 뜻의 구현이라는 기본 전제를 가지고 종교개혁 시대부터의 네덜란드 역사를 연구하면서 과연 네덜란드 역사가 그러하다는 확신에 도달하였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그가 1846년에 출판한 책 <조국 역사 핸드북 Handboek der Geschiedenis des Vaderlands>은 그의 생애 동안 가장 널리 회람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세대 동안 기독교 학교의 표준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그는 종교개혁 시대에 오렌지가의 윌리엄 1세가 네덜란드의 독립과 개신교 신앙의 확립을 위해 스페인에 대항하여 싸워서 마침내 네덜란드를 독립된 개신교 국가로 세운 역사 속에서 네덜란드의 섭리적 존재 이유를 발견했으며, 그것을 네덜란드가 국가로서 나아가야 할 미래의 방향으로 설정했다. 그런데 이것을 가장 위협하는 세력이 다름 아니라 프랑스 혁명의 결과 유럽으로 퍼져나가는 인본주의 사상이었다.
하여, 판 프린스터러는 프랑스 혁명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인본주의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는 혁명의 드러난 현상만이 아니라 근본 원리에 집중하였다. 그가 혁명에 대해 분석한 내용들은 일차적으로 프랑스 혁명을 생각하게 하지만, 그가 ‘혁명’이라고 말할 때에 의미하는 것은 프랑스 혁명이나 역사 속에서 실제로 발생한 어떤 구체적인 혁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요 통치자임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을 역사의 주인으로 주장하는 모든 사상과 운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책으로 출판된 그의 강연 <불신앙과 혁명>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혁명은 모든 불신앙적 사상과 운동과 그 결과물을 가리킨다. 판 프린스터러가 살았던 역사 시기에는 그것이 프랑스 혁명으로 촉발되어 유럽 각국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구체화되었을 뿐이다.
* There is not a square inch in the whole domain of our human existence over which Christ, who is Sovereign over all, does not cry, 'Mine!'
이용약관 | 개인정보 취급방침 | 공익위반제보(국민권익위)| 저작권 정보 | 이메일 주소 무단수집 거부 | 관리자 로그인
© 2009-2024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고유번호 201-82-31233]
서울시 강남구 광평로56길 8-13, 수서타워 910호 (수서동)
(06367)
Tel. 02-754-8004
Fax. 0303-0272-4967
Email. info@worldview.or.kr
기독교학문연구회
Tel. 02-3272-4967
Email. gihakyun@daum.net (학회),
faithscholar@naver.com (신앙과 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