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나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거듭났으나 탕자처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집 안에만 있던 아들과 달리 회심하여 귀향한 아들의 눈에는 전과 다른 것이 보였다. 결코 떠날 수 없었던, 그러나 결코 같을 수 없었던 나의 기독교 세계관 여정을 짚어보려 한다.
80년대의 딱 중간에 진학한 내게 대학은 별천지이었다. 시골 촌놈인지라 미팅과 연애를 꿈꾸며, 왜 데모하는지, 그게 궁금했다. 진실을 아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시인이 절규했듯 신도 버린 80년 광주는 나를 데모 행렬에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도 제자훈련과 QT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하지만 복음의 진리를 믿는 기독교와 역사의 진실을 믿는 운동권 사이의 괴리는 너무나 깊었다. 서로를 정죄했고, 그사이에 낀 채로 부초처럼 떠다녔다.
그러한 나를 구원한 것은 기독교 세계관이었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와 제임스 사이어(James W. Sire), 송인규의 <죄 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 등은 기독교적 대답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읽을수록 뭔가 허전했다. 기독교 세계관 책에는 나에게 두 가지가 안 보였다. 성경과 역사! 세계관에는 ‘눈’은 있을지 몰라도 ‘손’은 없었다, 성경을 들고, 신문을 펼칠 손 말이다. 그 ‘눈’은 성경과 신문을 보지 않거나 보고도 보지 못하는 눈이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와 한국 교회사와 한국사를 읽으면서, 신학대학원에 진학하고 공부에 열중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러다가 목회하게 되었다. 그때 악몽 같은 고난의 연대기를 통과해야 했고, 내 사유에 결정적 전환을 주었다.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이 주야장천 비판하던 이원론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도 그러하거니와 내가 본 교인들은 예배와 생활이 이원론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예배드린 대로 못 사는 면이 전혀 없진 않아도, 자신이 산 대로 예배를 드렸다. 그러니까 예배와 생활의 이원론이 아니라 세속에 물든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성경 어디에도 이원론을 문제 삼은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세상과 분리가 아니라, 왜 세상과 똑같냐고, 세상적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느냐고 비판한다. 나는 이를 ‘혼합주의’라고 명명했다. ‘콘스탄틴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세상 한복판에 하나님 나라의 깃발을 꽂자는 외침이 결국 제 욕망의 종교적 재가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애초에 교회 갱신, 사회 변혁을 꿈꾸었지만, 문제 인식과 현실 진단이 영 잘못되어 있었다. 환자(신자)는 세상과 혼합되어서 사는데, 의사(기독교 세계관)는 세상과 분리된 이원론으로 진단하고 처방한 셈이니 어찌 병이 나으랴. 그렇게 참여를 외쳤건만, 그 결과는 전광훈이었으니 씁쓸하다. 교회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보다 못한 교회가 되었다.
또 다른 나의 문제의식은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과 존 요더(John Howard Yoder)를 경유하여 개혁주의 신학자인 헨드리쿠스 베르코프(Hendrikus Berkhof)의 ‘정사와 권세’를 알게 되면서부터다. 월터스는 구조악을 간과 혹은 약화시켰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Paul Wolterstorff)와 밥 하웃즈바르트(Bob Goudzwaard)와 달리 그의 책 어디에서도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볼 수 없었다.
한국 기독교 세계관에 끼친 그의 영향력을 감안할 때, ‘구조와 방향’ 도식이 그 책의 백미임을 고려할 때, 그것이 성경적 또는 애굽과 바벨론적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 구조를 지나치게 철학적으로 추상화해서 사회 현실에 뿌리 깊이 내린 구조악의 중요성을 그저 방향의 개선으로 가능하다는 생각을 심어준 점을 비판하게 되었다.
또 하나는 기독교 세계관의 개념 자체에 대한 비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확장하자는 것인데, 문자 그대로 기독교 세계관은 세상 바라보기이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은 ‘눈’이라고 하고, 신국원은 ‘안경’이라는 비유를 든다. 그러나 나는 눈은 몸의 일부이고, 기독교 세계관은 세상 살아가기라고 말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봄’ 보다는 ‘함’이고, ‘눈’ 보다는 ‘몸’이다. 그렇게 확장되고 심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개념 자체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인데, 쉐퍼의 말마따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로 질문 자체를 변경해야 한다.
이런 내 생각을 확증해 준 것은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이다. 그의 문화적 예전 시리즈 3부작은 기독교 세계관이 지나치게 주지주의로 흐른 것을 비판한다. 오히려 실천은 눈이 아니라 몸이다. 몸의 습관을 형성하는 기독교 세계관이어야 한다. 여기까지는 나와 일치한다. 그는 지나치게 예전 중심적이다. 이렇게 질문해 보면 안다. 한국교회의 위기가 예전 부족인가? 설교 중심적 예배의 한계 극복은 동의하겠지만, 예전적 예배가 대안이라면, 종교개혁기 이전으로 회귀하자는 것이고, 한편으로 예배 중독과 다를 바 없는 현재 상황에서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마 23:4)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로마서 12장 1~2절이 말한 대로, 몸으로 살아내기, 비제의적 교회 공동체가 되는 것이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여정을 돌아보니, 내가 돌아온 지점은 손봉호이다. 그분의 초기작과 최근의 저서를 훑어보면, 그토록 비판했건만, 내가 그를 떠난 적이 없었음을 새삼 확인한다. 월터스(Albert Marten Wolters)나 사이어를 읽는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손봉호를 읽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이제 그럴 때가 되었다. 돌아온 탕자나 집 안의 탕자 모두를 너르게 받아주며 방향타를 제시하는 손봉호에게서 다시 시작할 때다,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말이다. 그리고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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