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이번 호는 기독교학문연구회 춘계학술대회(2024. 5. 18) 주제, ‘기독교 세계관 연구 40년과 위기의 시대’와 연동되어 있다. 즉, 지난 40년 동안 기독교 세계관 연구와 운동의 가치와 의미를 간략하게 정리·평가하고, 우리가 한국 사회와 교회 속에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통하여 의미 있는 활동과 섬김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부여잡고, 무엇에 더 집중하는 것이 시대적으로 필요할지 혜안을 얻자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특별히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1981)와 기독교학문연구회(1984) 시절부터 각자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충성된 일꾼이자 산증인으로 섬겨오신 조성표 박사님(경북대 경영학부 명예교수)과 양성만 박사님(우석대 교양학부 철학 교수)의 회고와 말씀을 통해 그 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인터뷰어 : 석종준 (서울대 캠퍼스 선교사)
일시 & 장소 : 2024년 6월 8일(토) 오후 9시, ZOOM 회의실
석종준 : 조성표 박사님, 양성만 박사님 안녕하세요. 두 분은 어떤 계기로 기독교 세계관운동에 동참하셨고, 섬기신 활동은 어떤 것들이 있으셨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조성표 : 1985년 기업에서 근무하던 중 인천대학에 강의를 나가서 산업공학과 장경 교수님의 연구실에 들렀는데, 우연히 본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 팜플렛에서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다.”라는 글귀가 내 가슴에 뜨겁게 다가왔습니다. 또 1986년 3월 경북대 교수로 부임했을 때, KAIST 성경공부에서 뵈었던 양승훈 교수님(당시 경북대 물리교육과)을 다시 만나 입회원서를 작성했지요. 1990년에는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 조직 설계에 깊이 관여한 죄(?)로 대표 격인 ‘기획’을 맡았고, 예수원 대천덕 신부님께 인사하러 가서 이사회를 조직했어요. 이른바 ‘장관 빽’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단법인 인가를 위해 ‘기독학술교육동역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6개월 넘게 교육청에 드나들며 1993년에 인가를 받았습니다. 이후 2009년, ‘기독학술교육동역회’는 1984년에 결성된 ‘기독교학문연구회’와 통합하여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이하 ‘동역회’)가 되었지요. 저는 ‘기독교세계관연구소’ 소장, ‘기독학문연구회’ 학회장, ‘동역회’ 실행위원장으로 섬겼고, 현재는 ‘동역회’ 이사로 있습니다.
양성만 : 40여년 전 저는 서양철학을 전공하는 고려대 대학원생이었는데요, 어느 날 당시 유학 중이던 신국원 이사장님의 지인이라는 황영철 목사님(현 성의교회 담임목사)께서 전화로 ‘기독대학원생 공부 모임’에 초청하셨고, 그때 두말없이 참여하겠다고 했어요. 철학을 전공하면서 늘 무신론적 주장에 시달렸는데, 이런 고민을 함께 풀어 보려는 모임이 있다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이 모임을 통해서 기독교 세계관을 접하게 되었고 아브라함 카이퍼, 도여베르트, 알버트 월터스 등을 만났습니다. 또 마침 주변에 손봉호 교수님을 비롯해 관련 학자도 여러분 있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학문연구회’를 결성하였습니다. 그 후 저는 개인적인 이유로 활동을 쉬었다가, 수년 전부터 다시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고, ‘기독교철학회’ 회장과 ‘동역회’ 이사로 봉사할 기회도 갖게 되었지요. 감사하게도 일찍부터 <창조 타락 구속>(월터스, 1995)의 번역에 참여해서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원조 중 하나라는 칭호도 얻었습니다.
석종준 : ‘동역회’는 1980년대 대학원생들과 젊은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한 ‘기독학술교육동역회’와 ‘기독교학문연구회’라는 두 기독교 세계관 연구와 운동 주체가 2009년에 통합된 것입니다. 통합 배경과 결과에 대한 평가를 주신다면요.
양성만 : ‘기독학술교육동역회’와 ‘기독교학문연구회’의 초기 배경에는 모두 웨슬리 웬트워스 (Wesley Wentworth)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모두 서울에서 시작되었는데 편의상 하나는 KAIST, 다른 하나는 KAIST 밖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당시 수차례 KAIST를 방문했고 연합 학술발표회에 참여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KAIST 주축의 ‘기독학술교육동역회’는 기독교대학의 설립을 비전으로 품고 활동했어요. 반면 ‘기독교학문연구회’는 ‘기독교학문’ 연구와 수립이라는 좀 더 일반적 목표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두 단체는 항상 서로를 인정했고 존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두 단체를 통합시켜주셨습니다.
조성표 : 국내에 기독교대학 설립 요건이 너무 까다로워 양승훈 교수님께서 1997년 경북대 교수직을 사임하시고 캐나다로 출국하셔서 1998년 ‘밴쿠버세계관대학원’(VIEW)을 설립하여 운영함에 따라 ‘동역회’의 국내 사역이 약화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학문연구회’도 당시 학생이던 주요 회원들 다수가 유학을 떠나 일시적으로 활력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기독학술교육동역회’의 저와 ‘기독교학문연구회’의 김승욱 교수님(중앙대 경제학과)이 국내에서 두 단체를 각각 주도적으로 섬기며 고군분투하던 시기였지요. 단체 힘이 약해지니 겸손함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두 단체의 통합을 본격적으로 논의하였고, 마침내 ‘동역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초대 이사장 손봉호 교수님(당시 서울대 사회교육과)께서 “많은 단체가 갈라지는데 이같이 두 기독교 학술 단체가 통합되는 일은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기뻐하시던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석종준 : 한국 기독교 세계관 연구와 운동의 지난 40년을 대략 전기, 중기, 최근으로 나눌 때, 어떤 특징이 있었다고 보시는지요.
조성표 : 1970~80년대는 기독교가 전도에 전력하여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이때는 높은 경제 성장과 함께 정치적 권위주의의 폐해도 심하였는데, 교회는 협소한 정교분리를 내세우다 아무런 대답을 주지 못하였지요. 특히 교인들 속에는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이원론이 팽배했는데요. 이를 해결하려는 자각이 마침 일어나, 1980년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이 소장학자들을 움직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그리스도인 지성 사회를 흔들었고, 따라서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와 ‘기독교학문연구회’ 뿐 아니라, 한국 라브리 공동체,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비즈니스선교, 각종 기독교 NGO 문화 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최근 이러한 모임이 다소 약화된 경향이 있어 안타깝지만, 다행히 우리 ‘동역회’는 중견 학자, 소장 학자들에까지 그 흐름이 이어지고 있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양성만 : ‘기독교학교문연구회’ 중심으로 말씀드리면, 1기는 대학원생들 중심으로 모이던 연구회 시기입니다. 웨슬리 선교사님이 IVP 고문으로 계시면서 사람을 모아 공부하게 하셨고, 그때 주도적인 분들은 김헌수, 황영철, 또 KAIST의 양승훈 등이었습니다. 모임 장소는 KAIST 대학교회, IVP 사무실, 교수님 연구실이나 집, 교회 교육관 등 다양했습니다. 공부 자료는 웨슬리 선교사님이 제공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지는 자율적으로 정했습니다. 그러다 몇 모임이 함께 정기 ‘집담회’를 갖기 시작했고 소식지도 냈습니다. 2기는 교수님들이 모임에 본격적으로 가담한 시기입니다. 1990년대에 이르자 초기에 참여했다가 유학갔던 분들이 들어와 대학에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도 웨슬리 선교사님이 이분들과 기존 ‘기독교학문연구회’ 멤버가 함께 모이는 자리를 만드셨어요. 그 자리에서 이분들이 함께 ‘기독교학문연구회’를 이끌기로 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학문연구회’는 본격적으로 정기 학술학회를 개최하고 전문학술지 <신앙과 학문>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기는 2009년 ‘기독교학문연구회’와 ‘기독학술교육동역회’가 ‘동역회’로 통합된 이후 오늘까지 시기라고 볼 수 있겠지요.
석종준 : 지난 40년 기독교 세계관 연구와 운동에서 가장 인상적 장면들은 개인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으셨는지, 각자 세 가지 정도 소개와 그 이유도 간단히 말씀해주시지요.
조성표 : 우선 1986년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에 가입해서 조직 설계에 깊이 개입하여, 1990년 대표 격인 기획 담당을 갑자기 맡게 되었을 때 일입니다. 포항에서 열린 ‘세계관 수련회’ 기간 중 출국하는 전임자 양승훈 교수님을 경주 버스터미널에 모셔드리고 혼자 수련원으로 운전하고 돌아오는 길이 두렵고 외로웠습니다. 다만 200명 넘게 참여하여 성황을 이룬 수련회의 동역자들을 보며 다시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제가 기획 담당을 맡으니 못 미더우신 탓인지, 원동연 박사님이 ‘학회’를, 김경천 박사님이 ‘운동’을 나누어 섬기게 하셔서, 더 부흥하게 하셨습니다. 또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 이사회가 강남 대륙선교회 빌딩에서 열렸을 때, 김준곤 목사님(C.C.C)께서 우리 소장 학자들에게 “다른 나라는 젊은 사람, 식자층일수록 교회를 떠나는데, 젊은 학자들이 이렇게 열성인 것을 보면 우리나라는 큰 희망이 있네.”라는 말씀이 기억납니다. 마치고 승강기를 타고 내려갈 때는 “미친 사람이 있어야 해. 사람이 많은 것보다 미친 소수가 모든 일을 이끌어 가는 거야.”라고 하셨는데, 그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모두 흥분된 마음으로 다짐했습니다. “그래, 젊을 때 미치자!” 이러한 격려에 힘입어 젊은 시절에 세계관 운동에 몰입한 것 같습니다.
양성만 : 첫째 장면은 충정로 IVP 사무실입니다. 거기서 김헌수 씨가 갓 번역한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제임스 사이어, IVP)으로 공부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20대, 30대 청년들이 한국에서 최초로 세계관 공부를 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때 웨슬리 웬트워스 선교사가 귤을 사주어서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모임이 씨앗이 되어 ‘동역회’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둘째 장면은 몇 연구모임들이 1984년 여름에 함께 모여 ‘집담회’를 열고 공부했던 것을 정리해서 발표하고 토론했던 일이에요. 밤늦게까지. 그 순수함, 열정, 동지애가 오늘날까지 우리를 이끌어 온 원동력이 아닐까 합니다. 셋째 장면은 2년 전, 웨슬리 선교사님 환송회였습니다. 공식 직함이 없는 평신도 한 사람이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100명 넘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이분께 도움과 도전을 받은 이야기를 한결같이 쏟아냈어요. 한 사람이 주님과 형제를 사랑하여 자기를 희생하고 봉사한 결과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이분의 정신과 노고를 이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석종준 : 최근 한국에서 기독교 영향력과 위상은 안타깝게도 계속 퇴보한다는 다수 발표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 세계관 연구와 운동의 주체들이 여전히 가치와 의미 있는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필요하다고 보시는지요.
양성만 : 저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출발점이나 원동력은 근본적으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음부의 권세를 이길 권세를 교회에 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복음을 들을 때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을 주님으로 섬기고 살 마음과 힘을 얻게 됩니다. 그 구체적인 삶이 가정과 직장 생활에서, 학문연구에서 나타납니다. 이때 기독교 세계관이 중요한 나침반의 역할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원동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의 진정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다음같이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덧붙여 우리 ‘동역회’가 한국을 대표하는 기독교 학문 단체답게 우리나라 사회와 교회에서 돌출되는 문제들을 조금 더 체계적으로 조직적으로 장기적으로 연구해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성표 : <한국 사회의 발전과 기독교>(예영, 2012)라는 책을 편집한 적이 있어요. 책을 보면, 1900년 초 한국에서 기독교의 기여는 절대적이라는 증거를 많이 제시합니다. 많은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설립하고, 주초, 도박, 축첩을 금하고 농촌경제살리기 운동을 통하여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3.1운동도 주도하였습니다. 1970년대도 우리의 삶과 의식을 개혁한 새마을운동의 주축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와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건전한 사회 참여와 개입이 많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따라서 영향력이 감소한 것은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적 나태함도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최근 한국 사회는 극도의 갈등 양상을 보입니다. 일부 교회와 기독교단체의 구성원을 보면 성경보다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편향성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다시 성경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고, 전문가로서 각자의 전공을 활용해서 여러 갈등과 사회적 문제를 성경의 진리에 따라 바르게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석종준 : 같은 정체성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느냐의 여부는 젊은 세대 구성원이 얼마나 함께 하고, 또 계속 세워지고 있느냐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모든 운동의 역사적 교훈인 것 같습니다. 두 분께서는 젊은 그리스도인 지성들에게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동참을 위한 어떤 초청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양성만 : 첫째, 기성세대가 우선 다음 세대가 받아들이고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세계관과 사고방식에 주목하고 여기에 어떻게 적절히 대응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둘째, 젊은 세대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두 가지인데요, 우선, 일반 학문을 적절하게 수용하면서도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이것을 기독교적으로 변형시킨 학자의 모범을 먼저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당시의 일반 학문을 섭렵하여 소화하면서도 성경에서 그가 깨달은 진리와 끊임없이 견주고 비판하고 교정합니다. 물론 그가 이를 통하여 성공한 부분도 있고 실패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쪽 모두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생활의 굵은 줄기나 세세한 부분에 말씀이 지속적으로 작용하여 우리의 성화가 이루어지듯, 기독교 학문도 바로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나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조성표 : 우리 세대는 30대 초반, 20대 후반에도 교수가 되었습니다. 대학에 자리를 잡으면 성경공부그룹을 세우고, 전공에 따라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나 창조론을 공부하여 전파하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부임한 교수님들은 대개 30대 중반을 넘어서고, 대학의 요구와 집안일에 대한 부담이 많은 탓인지 이러한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교 세계관 공부가 전공 연구와 교육에 큰 유익이 있었습니다. 교수는 대개 전공에 갇혀서 보는 시야가 좁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세계관 공부는 전공의 하부를 지탱하는 기초와 경계 밖 주변 학문을 함께 보게 함으로써 자기 학문의 역할과 한계를 알게 합니다. 제 전공은 회계학인데요. 기독교 세계관 공부로 여러 세계관 및 경제학의 기초와 근본 가정, 철학 등을 함께 공부할 수 있어서 시야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특히 4차 산업혁명 이후 융합학문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이 시기에 기독교 세계관 공부는 특정 전공의 한계를 극복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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