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심연에 머무르기, 역설을 끌어안기
: 탁장한의 <서울의 심연>(필료한책, 2024)을 읽고
동자동 쪽방촌을 중심으로 오랜 기간 연구와 활동을 이어 온 탁장한의 반가운 신간이 나왔다. 탁장한은 전작 <누가 빈곤의 도시를 만드는가>에서 쪽방촌으로의 여정을 막 시작한 저자가 쪽방촌을 둘러싼 다양한 시선들을 검토하고, 그 가운데에서 쪽방촌이라는 빈곤의 공간을 새롭게 읽어내기 위한 시각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3년의 시차를 두고 출판된 신간인 <서울의 심연>에서는, 지난 5년의 기간 동안 몸소 경험한 쪽방촌의 현실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쪽방촌을 둘러싼 다양한 개입의 실태를 가감 없이 기록해 내고 있다. 쪽방촌에 처음 관심을 가지고 여정을 시작할 때부터, 자활 기관에서의 거주와 활동, 그리고 쪽방에 직접 들어가 지낸 5번의 계절까지, 지난 5년 동안 위치와 입장을 달리하며,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민하는 가운데 건져 낸 생생한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도입부에서는 거주공간으로서의 쪽방(촌)과 생활환경 및 사회적 관계에 대해, 저자 자신의 입주 과정과 거주 경험을 바탕으로 서술하고 있다. 무더위와 추위, 악취와 소음과 같은 열악한 생활환경에 더하여,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계약관계, ‘집주인-관리인-세입자’로 이어지는 감시와 착취, 그리고 주민 간에 만연한 상호 불신과 반목까지, 쪽방(촌)을 둘러싼 참상을 여과 없이 기술하고 있다.
본론에 해당하는 세 장에서는 쪽방촌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세 기관인 쪽방 상담소, 사랑방, 교회의 빈곤 감소 개입에 대해 분석한다. 이들은 각각 절차성, 당사자성, 진정성이라는 서로 다른 관점으로부터 쪽방촌 주민들에 대한 다양한 개입을 시도하고 있다. 각 기관이 수행하는 활동의 선을 따라가는 실제 활동의 현장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과 목소리가 서로 엇갈려 나가는 지점들을 포착한다. 그리고 각각의 기관의 의도와 목표, 노력을 이해하고자 하면서도,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해결되지 못한 모순과 한계를 발견한다. 그리고 모순과 뒤틀림의 지점을 단순히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낸 역설 한가운데 머무르며 쪽방촌이라는 공간을 구성하는 다양한 행위자들과 기관들의 배치를 찬찬히 살펴본다. 이를 통해 각자의 모순과 뒤틀림이 서로 부딪히고 얽혀드는 가운데, 쪽방촌이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심연과도 같은 공간이 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결론에서 저자는 쪽방촌이라는 심연의 공간이 쪽방촌으로 유인하고 정착시키는 '구심력'과 쪽방촌 바깥으로의 이주를 발생시키는 '원심력'의 절대적인 불균형에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즉, 갈 곳 없는 빈곤층들이 지원을 위해 쪽방의 비인간적인 거주환경을 감내해야 하거나, 좀 더 나은 주거환경을 찾아가는 대신 지원에서 끊길 수밖에 없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몰리게 되면서, 결국 쪽방에 계속해서 머무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제언으로서, 빈곤 개입 기관들의 선한 의도가 생각지 못한 역설을 가져올 수 있음을 기억하고 빈곤 거버넌스 전반을 개선해 나갈 것, 쪽방촌의 조속한 재개발을 통해 쪽방촌 거주자들의 존엄한 거주를 실현할 것, 그리고 쪽방촌 바깥으로의 이주라는 선택지를 제도적으로 보완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최대 미덕은 쪽방촌을 둘러싼 근본적인 역설과 모순을 그 자체로 끌어안고서, 섣불리 누군가를 비판하고 쉬운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빈곤 당사자들과 지원 관계자들의 목소리를 촘촘히 담아내고, 문제를 바라보는 다각적인 시점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역설을 견디지 못하는 섣부른 개입은 빈곤의 현실을 거주자 개개인의 죄와 나태의 문제로 돌리며 신앙의 이름으로 당사자들을 비판하거나, 운동의 목표를 선명히 드러내기 위해 다루기 난감한 내부의 실질적인 요구와 갈등상황을 외면하는 모순으로 나타난다. 이에 저자는 심연의 한가운데에 함께 머무르고, 역설을 직시하며, 우리 자신의 선한 의도와 사역이 모순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겸허히 타자에게 귀를 기울이기를 요청한다.
필자는 모순과 역설의 심연 한가운데를 그려낸 본서의 서술을 보며,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과 함께 머무르시고, 인간의 죄악과 모순을 온몸으로 끌어안으시고 희생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렸다. 혼란스러운 세상 한가운데에서, 쉽게 비판할 대상을 찾기보다는 겸손한 자세로 타자들과 함께 머무르며, 모순과 역설을 직시하고 그 가운데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가는 것이,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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