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이란의 사미라 마흐말바프(Samira Makhmalbaf)의 영화 <칠판>(blackboard)에서 선생님들은 큰 칠판을 어깨에 메고 황량한 사막, 길이 없는 곳에서 가르칠 학생들을 찾아다닌다. 만나는 아이들에게 글을 배워보겠느냐고 묻지만, 배우려는 아이들이 없다. 결국 칠판은 공습대피용 판막이로, 환자를 나르는 들것으로 사용된다. 20세였던 영화감독의 눈으로 보았던 이 세계는 생존만으로도 살아있는 자로서의 책무를 다한다고 할 만한 상황 속에서, 배울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교사들의 고단한 삶을 보여준다. 오늘날 교육의 현장에서, 교회의 다음 세대 사역현장에서, 혹은 기독교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서 한 번쯤은 고민해본 그리스도인들의 고민이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대학에서 지난 십 수년간 기독교 세계관을 직·간접적으로 가르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세대가 지날수록 맥락적 소통이 쉽지 않은 경우도 생겨서 고민하던 차에, <소명과 진로네비게이션>을 통해서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고전읽기와 창의적 글쓰기>를 통해서는 글로 학생들과 만나게 되었다. 특별히 자신을 노출하는 글이 불편한 학생들을 수업에서 만나면서 가장 필요했던 것은, 레비나스(E. Levinas)가 말했던 타자의 얼굴을 보는 일이었다. 분명 수업에서 학생들을 만나지만, 그들의 눈코입을 넘어선 ‘타자’라는 인간을 만나는 순간을 위해 필요한 것은 용기였다. 학생들은 종종 들리지 않는 소리로 말한다. “혼자 있는 것이 편합니다. 그냥 수업만 하세요”, “당신의 수업이 나의 미래와 무슨 상관인가”, “바른 가치관이 나의 직업과 무슨 상관인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는 “나는 누구인가”에서 찾아야 하며, 자신의 정체성은 “나는 어디에 소속되어야 하나”라는 공동체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확립하게 된다고 맥킨타이어(A. MacIntyre)는 제시했다. 실제로 “향후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에 집중하는 대학생들은 직업과 자신의 정체성을 연결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직업과 사람됨, 공동체가 함께 연결되지 않을 때, 청년들은 왜 대학이 필수코스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의 손안에는 이 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인 스마트폰이 있고, 놀라운 검색엔진과 대신 답해줄 인공지능도 학생의 보조자로 함께 강의실에 앉아 있다. 학교가 아니라 학원에서 더 구체적인 진로지도를 위한 지침을 받아왔던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와서도 대안대학이 필요한 때이다. 대학의 청년들이 불편해하는 것은 직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교양수업에서 ‘인간됨의 변화’를 제시할 때이다. 내면으로부터의 변화를 상징하는 기독교적인 교육의 전통적인 목표는 학생들로부터, 사회로부터 거친 저항을 받는다. 심지어 그리스도인 학부모들로부터도. 자격증만 얻으면 전공과는 다른 삶을 살겠다는 학생들이 강의실 절반을 넘길 때도 있다.
이제 교수의 역할은 책상, 강의실에서 나와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신을 기다리는 공동체의 일원이 될 준비를 도와야 한다. 교수자가 먼저 타자인 학생들을 향해 지속적으로 다가가며 그 삶에 참여하고 함께 할 시도를 해야 한다. “나는 너와 함께 한다”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학생들 앞에서 살아내야 한다. 어느 정도의 함께함이어야 하는가? 과연 이 시대의 청년들이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며 서사적 통일성을 가지고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을까.
필자는 대학생 시절 예수님을 믿고 곧 공동체적인 삶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 공동체로서의 삶이 근간이 되어 대안공동체학교가 가능했던 것 같다. 대학교수로서의 일정과 함께, 십수 년간 대안공동체 학교를 교육선교사님들과 함께 섬기면서 다양한 학생들을 만났다. 몇 해 전부터, 공동체의 리더가 청년들을 만날 때, 첫 질문으로 “빚이 얼마인가?”를 묻기 시작했다. 그 질문은 필자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청년들이 함께 모든 일과가 끝난 밤에 음식점의 밤 청소를 시작하면서 때로 필자도 함께 하게 되었다. 말없이 땀을 흘리며 함께 하는 그 시간, 그 공간에 주님은 함께 하신다. 바로 그곳이 공동체가 하나의 -ism(주의)로 남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는 시공간이 되는 것이다. 또한 공동체 청년들이 이처럼 세상 속의 다른 사업장에서 일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안공동체 학교의 졸업생들 중 공동체 학교에 남아서 다음 세대를 위해 섬기는 청년들과 최근 카페도 개업했다. 지역의 어른들이 청년들을 귀하게 여기고 힘을 합해 건물주를 만나 창업을 도와 주었다. 카페가 문을 열자, 비그리스도인 건물주가 자신의 친구들을 만나러 오고, 한쪽에는 성경 공부가 이루어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여느 카페에서처럼 소소한 얘기를 나눈다. 이같이 경계를 넘어서 함께 하는 삶,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구현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린다.
혼자만 있겠다는 학생을 지속적인 관계 속으로 이끌고, 타자 지향적인 삶으로 초대하며 마침내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도 연약한 자, 도움이 필요한 자들과 함께 하는 힘을 어디에서 배울 것인가. 개혁주의 기독교 교육에서 추구하는 인간 됨은 책임성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 책임성을 가지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대학교육 과정은 좀처럼 드물다. 월터스토프(N. Wolterstorff)가 제안했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를 반기는, 귀향을 준비하는 실천 지향적 운동이 촘촘한 삶의 스타일로 보여지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미래의 올 예루살렘, 우리의 고향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확대된 몸이 귀향의 대로를 만들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소망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다음 세대가 우리와 함께 그 길을 가도록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이렇게 우리와 함께 소망하며 기다리는 학생들을 찾을 수 있는가. 학교에서만이 아니라, 배움을 마련해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찾아다녀야 한다. 칠판을 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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