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2024년은 한국 개신교에 아주 특별한 해다.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40주년뿐 아니라, 최초의 연합기구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100주년, 미국 선교사 주도로 만들어진 첫 민영방송 기독교방송(CBS)의 70주년이기도 하다. 또, 50주년을 맞은 로잔대회가 한국에서 4차 대회를 열기도 했다. 현대사 속 한국 교회의 부침과 영욕을 읽어낼 기회가 거듭되고 있다.
글 제목을 <‘그때도, 지금도 맞는 것’, 그리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는 것’>이라 정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따온 거다. 작품 내용과 상관없이 심오한 타이틀이다. 인간사의 옳고 그름이 시대적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통찰한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나아갈 길을 내다보는 우리의 노력에도 꼭 필요한 통찰이다.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이하 ‘동역회’)의 사명은 진리와 맥락 사이에 ‘다리놓기’라고 하겠다. 복음과 우리 삶의 다차원적 국면을 학문이라는 도구로 연결하는 작업이니 말이다. 결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본령은 복음주의가 신앙하는 진리를 구체적인 사회, 문화, 경제, 정치의 영역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 실천할 것인가의 문제로 수렴된다. 인간의 인식적 한계로 인해 진리의 절대성에도 불구하고 그 해석과 적용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달라지는 것’과 ‘달라질 수 없는 것’의 지혜로운 분별은 필수적이다.
따라서, ‘동역회’가 나아갈 길을 논하는 일도 40년을 사이에 두고 1984년과 2024년의 다름을 살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아래 표는 그 차이를 가름할 수 있는 지표들이다. 같은 사회인가 싶을 만큼 큰 변화를 보여준다.
먼저, ‘그때’를 돌아보자. 1980년대 초중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주도로 시작되었고 그 세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다. ‘동역회’의 모태인 ‘기독교학문연구회’와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의 주역 역시 대학원생과 소장 교수들이었다. 개신교가 젊은 종교였기에 가능했다. 대학진학률이 20%대이던 시절 엘리트 중심적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청년 세대의 마음을 얻은 지성 사역이었다.
1984년을 사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인 통치 아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학생운동을 일상에서 경험했다. 하지만, 양적 성장을 거듭하던 한국 교회는 이에 침묵하거나, 아예 정권에 부역하기도 한다. 이때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청년 그리스도인이 복음주의를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에 관여할 수 있는 길을 제공했다. 새로운 신앙적 대안이 생긴 셈이다.
그러나 90년대까지 영향력을 확대해가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2000년대 들어 동력을 잃는다. 제도종교에 대한 불신, 특히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강화와 맞물린 결과다. 이 흐름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동역회’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젊은 세대의 관심과 참여는 크지 않다. 1세대와 2세대를 거친 후 세대교체는 지지부진하다. 물론 개별적 헌신을 통해 젊은 세대를 향한 사역은 이어지지만, 침체의 흐름을 거스르는 조짐은 없다. 사실 현재 많은 교회와 단체들이 똑같이 겪는 난제라는 게 더 심각하다. 개신교는 더 이상 젊은 종교가 아니다. 사회 전반에서 이미 오래된 종교, 낡은 종교라는 인식이 공고해져만 간다.
그렇다면 ‘지금’을 사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은 어떤가.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된 이후 독재와 같은 가시적 악은 줄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글로벌 구조 속 자본의 힘은 날로 강해지고, 경제성장의 정체가 빚어낸 치열한 경쟁으로 이들의 육체적, 정신적 삶은 피폐하다. 취업난과 OECD 최고라는 자살률이 그 엄혹한 현실을 대변한다. 정치, 세대, 성별로 구획된 갈등과 분열은 혐오의 시대를 낳았고, ‘공정’이 사회현상 대부분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부상했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 교회는 정치적으로 보수 진영의 든든한 뒷배, 사회적으로 극우적 목소리의 통로, 문화적으로 폐쇄성과 불통의 집단으로 인식된다. 최근 대선 과정, 공직자 청문회, 로잔 서울대회, 개신교 주최 대형집회 등은 공공영역에서 개신교의 이러한 상징적 위치를 굳힌 장면들이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 역시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다 할 대안이 못되며, 그들의 암울한 현실에 설득력 있는 복음주의적 해법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오히려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말은 특정 진영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도구로 오염되기도 한다.
이제 ‘동역회’가 나아갈 길은 ‘그때’의 열정과 방법론을 회복하고 재생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한번 신앙적 대안이 되려면 ‘지금’의 특수성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건, (1) 맥락에 따라 진리의 적용과 실천은 달라질 수 있음을 인정하는 지성 (2) 현재의 달라진 맥락을 깊게 이해하려는 수고 (3) 변화한 맥락에도 불구하고 지속될 것과 달라질 것을 분별하는 지혜 (4) 그에 따라 포기해야 할 것을 고집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할 것은 기꺼이 존중하고 수용하는 용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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