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한 학자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는 많은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때로는 풀리지 않는 갈등과 고뇌의 시간을 보내고, 지식을 넘어서는 지혜가 필요하며, 평생을 외로움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 이 여정 속에 지치지 않고 달려갈 힘을 얻곤 하는데, 같은 고민을 했던 선배학자가 고군분투를 하며 길을 낸 입구를 찾을 때다. 그 뒤를 따르는 자는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줄이고, 무거운 짐을 덜어내고, 더 나은 선에서 출발해 집중하고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지닌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학자로의 삶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당연한 생각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는다.
우리는 조직적인 도움도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학자의 길이 진짜 어려운 이유는 나와 ‘다른 관점’의 그리스도인 때문이다. 굳이 기독교 분열의 역사를 묵상하지 않아도, 당장 자신이 속한 그룹 안에서의 갈등은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겪어야 하는 번거로운 수고로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계산이 빠른 학자들은 이상적인 신앙의 공동체에 대한 망상을 빨리 접고 삶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공동체를 멀리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공동체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훈련하신 공동체의 모습을 보면, 각자 역할과 기능의 분담, 리더의 임명, 필요한 물품들과 장소를 갖추는 일, 기록을 하고, 예산을 세우고 지출에 대해 정확한 계산을 하는 일 등으로 가득 차 있다. 많은 불평과 싸움과 갈등으로 얼룩져 있지만 하나님은 공동체를 통해 그의 백성들을 훈련하셨다. 신약의 초대교회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인이 공동체를 이루는 수고에 익숙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이하 ‘동역회’)를 일궈온 선배학자들의 고뇌와 씨름이 그렇다. 학자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바쳐 오늘날 세상 한가운데에서 성경의 진리를 찾고 수호하고자 갈망하는 모든 입문자에게 좋은 터전이자 위로의 울타리를 세웠다고 확신한다. 개인의 무지함도 죄를 자각할 수 없어 위험하지만, 집단과 공동체의 무지함은 더 큰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동역회의 가치와 의미는 ‘맹목적이고 감정적 확신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집단적 무지함’을 향해 학자의 사명으로 ‘기독교는 무엇을 믿는가’를 파헤치고 명확하게 하고자 한 모든 노력에 있다고 믿는다.
지난 40년을 돌아보는 시니어 학자들의 노고를 다 알 수 없지만,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사람이 바뀌고 문화가 바뀌었으며, 쌓인 데이터의 양도 놀랄 만큼 풍성해졌다. 그러나 중세시대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었던 수도원 사제들이 말씀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반 신자들보다 믿음이 더 좋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오늘날 고도로 정보화된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 학자들이 접할 수 있는 성경 신학에 대한 정보의 양은 그들의 신앙의 깊이와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 한국전쟁 이후 성경을 구하기 힘들었던 선조들의 신앙의 진정성은, 핸드폰 안에 여러 버전의 성경을 담고 다니는 세대에 와서 더 깊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개인적으로 ‘동역회’에서 성장하고 배운 모든 순간은 선배학자와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였다. 신국원, 박영주 박사님과의 짧은 만남에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일상의 대화를 통해 가장 많이 소속감을 느꼈으며, 지나가며 해 주시는 한 마디에 그리스도인 학자로서의 성찰이 가장 활발히 일어났다. 학회 행사와 학술적인 강연과 토론 및 칼럼들을 통해 세상 속에서 기독교적 전략과 정보를 얻는다면, 개인적 관계나 멘토링이 주는 영향력은 실제적 소속감을 느끼게 했다.
오늘날 젊은 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나 지식의 양이 아니다. 형식적 글이나 강연으로 담을 수 없는 지혜의 언어는 개인적 관계를 통해 비형식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닐까 한다. 40년 동안 ‘동역회’가 순항했던 이유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서로 인격적 관계에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서로 다름에 관한 대화를 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어느 날 요한복음을 묵상하다가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과 종교지도자들의 언어와 행동이 너무나 오늘날의 '학자'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저히 이성적이었고 논리적이었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세세히 꺼내 읊을 수 있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고, 전략적이고 효율적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에 비해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그 지략으로 자신의 직업적 밥그릇을 빼앗기지 않는 방법론의 전문가였다. 대중의 인기와 사회적 지위와 풍족한 물질을 함께 누리며 예수님을 오히려 대적하는 길, 그 길을 이 세대 학자들이 가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지능이 높다고 해서 예수님을 더 잘 따르는 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젊은 학자로서 시니어 학자에게 바라는 한 가지는 우리에게 “어떻게 대화했고, 어떻게 이기심과 욕심을 내려놓았으며, 어떻게 갈등을 해결했으며, 어떻게 다름을 이해하면서도 진리를 지켜왔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왜 동역이 필요한지, 불필요해 보이는 수고로운 헌신이 왜 가치 있는 길인지?”에 대한 확신이다. 유사 이래 어쩌면 가장 편리함과 개인의 안위를 지키는 것에 능통한 전문가로서의 현재의 젊은 세대에게는, 특별하고 지혜로우며 인격적인 멘토링이 절실해 보인다. ‘동역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계속해서 흘러가기를 소망하며,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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