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예술에 대해 교회의 시각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미국의 한 개신교 목사가 초창기 영화에 대해 말하길, 그것은 ‘놀라운 발명’이고 특히 ‘교육적 목적을 위해 가치 있는 예술작품’일 수도 있다고 전망하였다. 얼마 후 상업적인 영화가 잇따라 나오자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을 변혁하라고 주장하는 대신에, “세상적 기구와 협력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결코 영화롭게 될 수 없다”라고 경고하였다. 로마로프스키(W. Romanowski)는 이런 고립주의적 사고가 그리스도인들이 문화의 구속적인 면을 찾아내어 그것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고 아쉬워했다.
아브라함 카이퍼, 한스 로크마커, 니글 리, 존 월포드, 캘빈 시어벨트,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존 윌슨, 윌리엄 더니스 등 개혁주의자들의 의견은 ‘예술에 대한 거리두기’보다 ‘참여를 통한 변혁’에 있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종교개혁 후의 네덜란드 사회가 얼마나 예술 창출에 적극적이었는지 상기시켰고, 반 틸은 모든 인간은 문화적 요구를 완수할 신성한 사명을 지닌다고 했으며, 한스 로크마커는 그리스도인의 ‘적극적 개입’을, 월터스토프는 ‘행동하는 예술’을 각각 역설하였다. 이런 프로테스탄트들의 전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제자리걸음을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여러 학자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국내 예술계에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눈에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진행되어왔다. 먼저 개혁주의 미학을 학술적으로 검토한 신국원 교수는 기독교 예술이 나갈 바를 ‘문화 돌봄’과 ‘생명 돌봄’으로 보면서, 소망의 기초를 사회적 공동선에 둘 것을 제안했다. 한편, 최태연 교수는 타락 이후 불안과 파괴에 시달리는 세상 속에서 ‘구속적’ 관점을 담은 예술에 주목할 것을 역설했으며, 라영환 교수는 17세기 네덜란드 화파에서 20세기에 이르는 개혁주의 회화의 역사를 검토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그리스도인 예술가의 소명을 강조하였다. 일찍이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한 예술을 소개한 오의석 교수는 “세속화된 미술이라고 외면해버릴 것이 아니라 뛰어들어 개혁하고 회복시키는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다. 안용준 교수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캘빈 시어벨트와 한스 로크마커의 개혁주의 미학의 연장선상에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부합하는 아름다움의 세계를 찾아 나서는 것이야말로 참된 자유와 회복을 추구하는 것임을 역설한 바 있다.
기독교 세계관 이론가들의 연구는 중세적 사고에 머물고 있는 기독교 예술의 실재를 파악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신앙을 지닌 작가들이 체계적으로 예술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거나 학습할 기회가 없었다. 그리스도인의 미술을 종종 ‘교회 미술’과 혼동하는 시각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좁은 의미의 예술 활동’이란 것을 숙지해야 한다.
만물이 그리스도에게서 나왔고 그분에게 속한다면 문화예술의 주권 역시 그리스도께 속한다.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이다.”(시 24:1) 역사적으로 볼 때 개신교에서 시각 예술가들이 저조한 성적을 거둔 것처럼 여겨지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종교개혁의 후예들이 적극적으로 예술에 참여한 결과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을 탄생시켰다. 지금의 풍경화, 정물화, 장르화 등은 모두 그 시대의 산물이란 점이 놀랍다. 이들은 교회만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 더 큰 역량을 발휘하였다.
프리츠 아이헨버그,평화로운 왕국,목판화(1950)
기독교 세계관이 알려준 유익한 점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라 삶과 문화에도 관심을 가지신다는 점이다. 우리를 세상의 청지기로 보내셨다면 하나님이 주신 잠재력으로 피조 세계를 돌보며 선함과 아름다움의 문화를 창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주님의 일을 종교적인 것으로 좁혀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삶의 전반을 다스리는 주님이시며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느 지점에선가 마치 하나님은 하찮은 것에 신경을 쓰지 않으신다는 듯이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다.
신국원 교수의 지적처럼 중세에서 ‘신학’이 주축이 되었다면, 근대에는 ‘과학’이, 오늘날은 ‘미학’이 키워드로 떠올랐다. 싫든 좋든 ‘미학’의 시대에는 읽고 사고하는 것보다 듣고 보고 느끼는 것이 앞자리를 차지한다. 이것이 축복이 될지 해가 될지는 우리가 얼마나 책임감을 갖고 이를 대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방관자로 남을수록 상황이 나빠지고 그 영향이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점이다. 문화예술은 일과 잠 사이에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치를 부리기 위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문화환경 속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문화가 인간에게 주는 영향이 막대하다는 점에서 비판이든, 참여든, 변혁이든 반응이 요구된다. 우리의 경기를 축구로 비유하자면 우리가 응원하는 팀이 골을 넣지 않으면 상대팀이 골을 넣게 될 것은 자명하다. 즉 그리스도인이 문화의 수동적인 소비자로 머무는 것은 게임을 포기하고 종료 신호만 기다리는 것과 같다.
이런 시대일수록 현재 문화예술을 관통하는 요소가 무엇이고 왜 생겼으며 무엇이 결여되었는지 명확한 이해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필자는 이런 문화 이해의 기준을 기독교 세계관에서 구할 수 있다고 본다. 필자의 경우 내가 속한 예술계를 어떻게 돌보고 섬길지 고민하게 된다. 21세기의 예술적 의제가 무엇인지, 그에 대한 기독교적 반응은 어떠해야 하는지, 지배문화의 장점과 단점, 구속의 메시지와 그 능력에 대한 신뢰, ‘아디아포라’에 대한 보다 진취적인 해석 등이 우리의 문화 사역을 한층 역동적으로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머리를 맞대고 함께 이 주제들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미술계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전문적으로 확립해가는 예술가들이 있으니 여간 힘과 용기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구속받은 문화적 활동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낙관적인 것은 많은 시민들도 표류하는 삶을 헤쳐가고 싶은 욕망과 갈등하는 세상에서 평안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비전을 품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좋은 시그널이다. 그리스도인 작가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 바로 목전(目前)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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