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확산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대표적 인물들을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이론가들과 대중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운동가들로 크게 나눈다면 쉐퍼(Francis A. Schaeffer, 1912-1984)는 어디에 속할까? 필자가 보기에 쉐퍼는 이 두 그룹에 걸쳐 있지만, 운동가의 영역으로 좀 더 기울어진 인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쉐퍼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성장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쉐퍼는 1912년 미국 펜실베니아 저먼타운에서 독일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5년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 들어가 코넬리우스 반 틸과 그레샴 메이첸의 지도를 받았고, 1937년 페이스 신학교로 전학하여 1938년에 졸업했다. 페이스 신학교는 미국장로교회(현재 정통장로교회)와 성경장로교회가 분열되면서 설립되었다. 그는 성경장로교회에서 졸업한 첫 학생이자 안수를 받은 첫 졸업생이었다. 교육 배경으로 본다면 그는 보수적 복음주의, 혹은 근본주의 배경에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후에 기독교적 진리의 우주성, 복음의 공공성에 관련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쉐퍼가 살았던 시대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20세기의 주요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차례 세계 대전과 월남전을 경험했다. 그 중에도 그가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1차 세계 대전과는 달리 인류 역사에서 가장 파괴적이었다는 2차 세계 대전, 20여 년에 걸친 지루하고도 잔인했던 월남전, 그리고 그 전쟁들의 후유증은 쉐퍼로 하여금 근본주의의 좁은 복음의 틀을 넘어서 인간, 세상, 정치 등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갖게 했다.
전쟁에 더하여 쉐퍼의 세계관적 관심에 일조한 것은 그 시대의 사회적 조류나 운동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차 세계 대전 후에 나타난 유럽의 정신적, 영적 공황상태,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서구 사회를 휩쓸었던 히피 운동, 여성해방 운동, 로우 대 웨이드 판결 등 교회 밖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교회가 사회적 이슈나 흐름에 대해 침묵할 수 없게 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73년 WCC가 주관한 방콕대회가 ‘오늘의 구원’이라는 주제 아래 폭넓은 구원 개념을 논의하면서 ‘선교 모라토리움’을 선언한 것은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일종의 충격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비단 쉐퍼에게만 영향을 미쳤던 것이 아니다. 당시 복음주의 진영의 리더들이었던 빌리 그래함, 존 스토트, 피터 바이어하우스, 해럴드 오켄가, 칼 헨리 등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서 1974년 제1차 로잔 대회를 개최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로잔 대회의 주제는 사회적 도전과 변화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로잔 대회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인해 기독교 선교의 동력이 소진한 1970년대 기독교 선교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 넣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쉐퍼는 다양한 사회적 도전과 이슈들에 대한 대답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고, 이는 그의 다양한 저작들로 이어졌다.
쉐퍼는 수많은 대중강연과 더불어 철학, 문화, 사상, 예술, 영성, 교회 등 다양한 영역에서 22권에 이르는 책들을 썼다. 그는 이론가이면서 동시에 탁월한 소통자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서구 사상과 문화의 발달과 쇠퇴를 다룬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란 영화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별세한 지 40년이 지났지만, 그의 저작과 <그러면 우리는...>은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고 있다. 여러 저작 중에서도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그의 생각을 잘 요약한 책은 별세하기 3년 전에 출간한 <기독교인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특히 윤리, 정치, 사회 분야에서 기독교 세계관적 접근을 시도한다. 책에서 그는 “삶의 모든 영역을 포함하지 않는 이원론적인 기독교 관념은 참된 성경적 관념이 아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모든 삶의 영역에 영향을 끼친다. 이 모든 영역 안에는 단지 종교적인 일들뿐만 아니라 정부와 법률까지도 포함되어 있다.”(127면)라고 했다.
쉐퍼는 대중들에게 기독교 세계관적 사고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그의 아내와 더불어 알프스에 ‘라브리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저술과 강의를 통해 기독교가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답을 제공한다는 세계관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라브리’라는 말이 ‘피난처’를 의미하듯이 이곳은 20세기 강력한 세속주의의 공격에 대한 피난처의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하나님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정직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을 추구했다.” 그가 라브리에서 “기독교는 삶의 전 영역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라고 가르친 것은 라브리가 전형적인 세계관 공동체임을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 카이퍼가 계몽주의에 대한 반응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면, 한국에서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전통문화에 기반한 한국 교회의 이원론적 신앙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쉐퍼는 인본주의 세계관에 대한 절망과 더불어 복음의 사회성, 공공성에 대한 복음주의적 반성에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서로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참여한 배경은 다르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기독교적 진리의 우주성에 대한 확신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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